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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오늘 / 정재삼 그리운 오늘 / 정재삼 사랑합니다 이 말 한마디는 배우지 않아도 잘도 써서 듣는 당신에게 얼마나 짜릿할지 모릅니다 미안합니다 이 말 한마디는 배워서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베지 않음 어려운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 한마디 듣는 당신에겐 더 없는 인격이 존중되는 말입니다 시기와 증오와 오욕 속엔 미안합니다 보다 내 것 챙기는 말이 무성합니다 우리 사는 세상 배우지 않아도 잘 쓰는 말보다 우리 마음 속 훈련된 말로 살아가는 그리운 오늘입니다. 2023. 7. 10.
편지 / 김남조 펀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2023. 7. 9.
품격에 대하여 - 이영유 품격에 대하여 ― 품격, 그리고 한문을 쓴다 / 이영유 나, 스스로가 품격의 기준이므로 품격은 나이다 혀에 모터를 달고 끝없이 굴려보라 무슨 소리가 나는지, 하여간 품격은 나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다 한문(漢文)이 또 하나, 나의 국어임을 알게 된다 격이 없으므로 격이 있고 격이 있으므로 격이 없다 아직도 혀에 모터가 붙어 있는지? 그렇다면, 모터를 떼든가 혀를 뗄 일이다 2023. 7. 4.
시 뭐라도 썼다 / 황인숙 시 뭐라도 썼다 / 황인숙 잠 깨려고 커피를 마신 적 있나? 있다 있긴 있다만 대개는 잠을 깨려고 마시기보다 깨어 있어서 마셨다. 라고 나는 썼다 커피는 썻다 인생이 쓰고 즘생도 쓰고 뭐든지 쓴 밤 쓰지 않은 건 잠뿐 트리플 샷을 마셔도 쏟아지는 잠 그래, 커피는 마시는 것보다 쏟는 게 더 잠을 께게 한다지 뭐라도 써야 하는 밤 2023. 7. 3.
산비둘기 / 장 콕토 산비둘기 / 장 콕토 두 마리의 산비둘기가 부드럽고 상냥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그 나머지는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2023. 7. 2.
한 점 구름 / 헤르만 헤세 한 점 구름 / 헤르만 헤세 파란 하늘에, 가늘고 하얀 보드랍고 가벼운 구름이 흐른다. 눈을 드리우고 느껴 보아라. 하얗게 서늘한 저 구름이 너의 푸른 꿈속을 지나는 것을. 2023. 7. 1.
달팽이 / 김제현 달팽이 / 김제현 경운기가 투덜대며 지나가는 길섶 시속 6m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예까지 온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산달팽이 한 마리 쉬임없이 가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2023. 6. 30.
개여울 / 김소월 개여울 /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2023. 6. 29.
아이로 돌아가서 / 유안진(좋은 시 추천) 아이로 돌아가서 / 유안진 벗고 벗으면 아이로 돌아가질까 누더기든 정장이든 어른의 옷을 아무것도 아닌 것에 곧잘 홀려서 막무가내로 쫓아가는 그 눈빛 하늘빛의 사람인 것이 진정 자랑스런 天性(천성)의 참사람으로 미운 일곱살이라 좋아라 아이로 돌아갔으면 제 손바닥 크기로 세상을 사는 아이로. 2023. 6. 28.
구름 / 천상병 구름 / 천상병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꽃 뭇 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없이 목적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 수놓네 \ 2023. 6. 27.
이런 이유 / 김선우(좋은 시 감상) 이런 이유 / 김선우 그 걸인을 위해 몇 장의 지폐를 남긴 것은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필 빵집 앞에서 따뜻한 빵을 옆구리에 끼고 나오던 그 순간 건물 주인에게 쫓겨나 3미터쯤 떨어진 담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를 내 눈이 보았기 때문 어느 생엔가 하필 빵집 앞에서 쫓겨나며 부푸는 얼음장에 박힌 피 한 방울처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이 적막했던 것만 같고― 이 돈을 그에게 전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잘 기억하기 때문 그러니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 얼마 안 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 2023. 6. 26.
아기 기쁨이 / 윌리엄 블레이크 아기 기쁨이 / 윌리엄 블레이크 아기 기쁨이 / 윌리엄 블레이크 "나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겨우 이틀 전에 태어났거든요." 내가 너를 뭐라고 부르지? "난 행복해요, 기쁨이 나의 이름이에요." 달콤한 기쁨이 너를 찾아오기를! 예쁜 기쁨아! 겨우 이틀 전에 태어난 달콤한 기쁨아, 나도 너를 달콤한 기쁨이라고 부를게. 너는 미소하려무나, 그사이에 나는 노래할게 달콤한 기쁨이 너를 찾아오기를! 2023. 6. 25.
선운사에서 / 최영미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2023. 6. 24.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좋은 시 함께읽기) 슬픔이 하는 일 / 이영광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목을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 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2023. 6. 23.
신발 정리 / 정호승(좋은 시 감상) 신발 정리 / 정호승 당신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 신발 정리를 못했구나 창 너머 개나리는 또 피는데 당신이 신고 가리라 믿었던 신발만 남아 오늘은 식구들과 강가에 나가 당신의 모든 신발을 태운다 당신이 돌아다닌 길을 모두 태운다 푸른 강물의 물결 위로 신발 타는 검은 연기가 잠시 머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날 당신 떠나던 날 당신을 만나러 조문객들이 자꾸 몰려오던 날 이리저리 흩어지고 뒤집힌 그들의 구두를 정리했다 이제 산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과 죽은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이 다르랴 2023. 6. 22.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할 때는 없다 2023. 6. 21.
오줌싸개 지도 /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 윤동주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2023. 6. 20.
생각 담그기 / 유수연 생각 담그기 / 유수연 뼈 없이 붙는 살이 없듯 내가 먹은 게 나를 만들고 나를 담은 게 나를 말한다 물을 채우면 물병이 된다 이끼를 풀기 위해 비우고 채우고 있었다 물을 기르던 네가 꽉 쥔 주먹을 힘차게 던지고 가장 먼 물수제비를 본다 영영 찾기 힘들 것이다 주워 담을 수 없는 건 놓은 후에 잡고 싶어지니까 그래도 흘러가는 걸 잡고 싶다 내 앞에서 울던 때 처음 진실을 들키고 싶었다 2023. 6. 19.
밥값 / 문태준 밥값 / 문태준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에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 2023. 6. 18.
벽에 있던 자리 / 최지인 벽에 있던 자리 / 최지인 마흔이 되던 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고용센터 민원 대기실에 앉아 손에 쥔 번호가 불리길 기다리는 선배에게 지나온 삶은 행복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2023. 6. 17.
질문 / 나태주 질문 / 나태주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다 왜 시를 쓰고, 어떻게 해서 시를 쓰게 되었나요? 열여섯 나이 좋아하던 여학생 있었더란다 연애편지 쓰다가 시를 쓰게 되었지 연애편지는 어떻게 쓰나? 울렁이는 마음 고운 마음 사랑스런 마음 될수록 예쁘고 고운 말로 정성껏 다듬어서 쓰지 않더냐 그것이 바로 시 쓰는 마음이고 시란다 돈이나 물건을 얻는 것은 처음이요 사람을 얻는 것은 그다음이요 사람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란다 시란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것 그 사람 마음을 내게로 데려오는 것 그게 제일 크게 얻는 것이고 제일 장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도 나는 열여섯 아이 연애편지 쓰듯 세상한테 연애편지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거란다. 2023. 6. 16.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함민복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함민복 살며 풀어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2023. 6. 15.
어느날 / 김용택 어느날 / 김용택 나는 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 어느날 나는 태어났고 어느날 당신도 만났으니까. 그리고 오늘도 어느날이니까. 나의 시는 어느날의 일이고 어느날에 썼다. 2023. 6. 14.
혜안(慧眼) / 여영현 혜안 / 여영현 괴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지요 루어를 던지는데 고기가 물지 않았어요 옆에서 다슬기를 잡던 노파가 혀를 끌끌 차네요 그거 고무 미끼 아녀유? 쏘가리가 월매나 눈이 밝은디, 아, 쏘가리보다 눈 어두운 사내와 쏘가리만큼 눈 밝은 노파가 함께 저물어가는 괴산 그 강가 2023. 6. 13.
산 / 함민복 산 / 함민복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의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2023. 6. 12.
배웅 / 이문재 배웅 / 이문재 어머니 가시던 길 내가 업어드린 줄 알았는데 끝까지 내가 업혀 있었다 어머니 가실 때 내가 배웅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어린 늙은 내가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젊은 엄마 등에 업힌 채 엄니 모가지를 끌어안은 채 하늘 저쪽에서 나온 마중을 마중하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가시고 나서도 어머니는 언제나 엄마였다 엄니였다 그해 윤사월 초닷새 북북서쪽에서 연신 눈가루가 날렸다 2023. 6. 11.
서울 / 심재휘 서울 / 심재휘 무엇인가 일요일인데 왠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어서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고 무엇인가 어디론가 걷는다 길가에 장미가 필 유월은 나를 데리고 걷는다 장미를 보는 순간은 비행기를 볼 수가 없고 구름 위에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전화기 속의 당신을 들을 수 없어서 무엇인가 일요일인데 왠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고 걷는다 걸으면서 눈앞의 신호등이 서둘러 푸르게 변하기를 바라보며 나는 쓸쓸하지 않도록 걷는다 걷는다 걷는 동안 나는 나를 또 걷게 할 수는 없다 2023. 6. 10.
우산 / 박연준 우산 / 박연준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를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2023. 6. 9.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 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 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 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 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2023. 6. 8.
돋는다 / 박노해 돋는다 / 박노해 어둠 속에서 별이 돋는다 하늘은 겨울 속에서 꽃이 돋는다 나무는 고난 속에서 생이 돋는다 사람은 2023.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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